세계 왕조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궁중애사가 서려있는 경기도 화성의 "융릉(隆陵)-(사도세자와 헌경왕후의 능), 과 건릉(健陵)-(조선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 능)" 을 이번 연휴 기간에 가족들과 함께 찾아 보았다.
여기서 잠시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조선의 제21대 영조 임금은 맏아들 "효장세자" 를 일찍 여의고 7년간 후사가 없어 애태우던 영조는 마흔둘에 아들 "사도세자" 를 얻게 되어 즐겁고 기쁜마음에 원자의 호를 정하고 왕위를 물려줄것을 결심하게 되고 "사도세자" 가 태어난 이듬해 왕세자에 책봉하고 신하들에게 정성을 다하여 교육에 힘써줄것을 당부하였다.
"사도세자" 가 3세에 이르러 벌써 "효경"을 읽었고 글을 쓸줄아는 영특함에 영조도 매우 기쁘게 여겼으며, 어려서 부터 서예와 무예에 뛰어나 "사도세자" 가 14세가 되자 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 을 시작하게 되자 그를 경계하는 노론파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가 모함이 시작되었으며 형조판서 청지기 였던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사실 고변으로 영조가 크게 노하게 되었고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세자는 결국 뒤주에 같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영조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아들 "세자"를 슬퍼하면서 "사도(思悼)" 라는 시호를 내렸는 데 "사도세자" 아들인 "정조" 가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즉위하자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 으로 올렸고 다시 1899년에는 "장조(莊祖)" 로 추존되었다.
사진 위로부터 경기도 화성에 있는 "장조와 헌경황후의 능" 인 "융릉(隆陵)" 과 그의 아들 조선 제 22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 인 "건릉(健陵)" 이 5월의 싱그러운 신록을 가득품고 아름다운 릉의 자태로 이곳에 잠들어 있었다..
"융릉(隆陵)" 과 건릉(健陵)" 의 입구에는 140년 된 향나무와 100년된 향나무 두그루가 이곳이 궁중애사가 스려있는 "융릉(隆陵)" 과 건릉(健陵)" 을 지키고 있는 수호수처럼 오랜세월동안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입구에 들어서서 조금걸어 올라가면 적송과 참나무 군락지가 초록을 먹음고 있는 아름다운 오솔길이 펼쳐지고 "융릉(隆陵)" 과 건릉(健陵)" 의 갈림길이 나오는 데 우선 오른쪽의 아버지 "사도세자" 의 능인 "융릉(隆陵)" 쪽으로 먼저 둘러보기로 하였다.
"융릉(隆陵)" 올라가는 산책길 옆에는 참나무 군락지가 펼쳐지고 있었고, 싱그러운 녹색 잔디위에서는 정겨운 연인들의 정겨운 모습도 볼수 있었다.
이 아름다운 참나무 군락지에 "잎마른 병" 예방을 위해 검은 비닐들이 나무 둥치에 둘러싸여 있어 약간 안타까움과 걱정이 앞서기도 하였다..
여기가 "사도세자(장조(莊祖) 와 헌경왕후의 합장능" 인 "융릉(隆陵)" 이다..
이곳의 "융릉(隆陵)" 은 조선왕조 42기 능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조성되었다고 하는 데 이는 아들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작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곳의 "융릉(隆陵)" 은 다른 능에서는 홍살문에서 보면 정자각이 가려 능을 볼수 없는데 정자각 우측으로 능을 배치하여 능을 잘 보이도록 한것도 뒤주속에 갇혀 죽어간 아버지 "사도세자" 를 훤한 세상을 바라볼수 있도록 조치한 아들의 배려가 돋보이는 것 같았다..
정자각에서 보이는 "융릉(隆陵)" 의 모습이다..
1762년 윤 5월 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속에 갇혀 숨진 사도세자는 그해 7월 현재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 안장 되었는 데 영조는 묘호를 "수은묘" 라 하였는 데 그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아버지를 "장헌" 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수은묘"를 "영우원" 으로 격상하여 부르게 하였다.
또한 정조 13년에는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 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고 "현륭원" 이라 하였고, 그뒤 정조의어머니 "혜경궁 홍씨" 가 순조 13년에 승하함에 따라 이곳에 합장하게 되었으며 그 뒤 고종이 즉위하자 "사도세자" 를 왕으로 추존하고 묘호를 "장조(莊祖)" 로 격상하고 혜경궁 홍씨도 "헌경왕후" 로 추존하여 "융릉(隆陵)" 으로 능호를 정하였다고 한다.
한 많은 사연과 아들의 효심이 가득 배어 있는 "융릉(隆陵)" 을 둘러보고 지근거리 이웃에 있는 아들의 묘소인 조선의 제22대 "정조(正祖)" 능인 "건릉(健陵)" 으로 가는 산책로도 신록으로 가득한 오솔길이 펼쳐지고 있었다..
"융릉(隆陵)" 옆으로 신록이 욱어진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면 드디어 "사도세자" 의 아들이자 조선의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 의 합장능인 "건릉(健陵)" 에 도착할수 있었다..
"건릉(健陵)" 은 "사도세자" 의 능인 "융릉(隆陵)" 과 무척 닮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어 약간 헷갈릴수가 있을 것 같았다..
"건릉(健陵)" 은 "정조와 효의왕후" 의 합장능이고 정조는 "사도세자" 의 둘째 아들로 할아버지 "영조" 가 승하 하자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즉위하였고 즉위 직후 "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천명하고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다했다고 한다.
문무를 겸비한 정조는 "규장각" 을 두어 학문연구에 힘쓰고 지금의 "수원화성"을 쌓아 조선의 중흥을 이끌기도 하였다.
"정조" 는 1800년 6월에 49세로 승하하자 그의 유언대로 같은해 11월 아버지 능인 "융릉(隆陵)" 동쪽 두번째 언덕에 안장하였으나, 그로부터 21년후인 1821년 3월 "효의왕후" 가 승하하자 "융릉(隆陵)" 의 동쪽보다 서쪽이 명당이라 하여 "정조" 의 능을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고 "효의왕후" 와 합장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건릉(健陵)" 이 되었다고 한다.
"건릉(健陵)" 의 정자각 에서 보이는 초록물결이 넘쳐나는 "건릉(健陵)" 의 아름다운 풍경들이다..
"정조" 임금은 용모가 수려하고 자세가 반듯하였으며 사대부 중심의 왕조국가에서 드물게 "개혁군주" 였으며, 지금 개봉되고 있는 영화 "역린(逆鱗)" 이 회상되기도 하였다..
영화 "역린(逆鱗)" 에서 나오는 명대사 "중용23장" 인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세상을 바꿀수 있다" 는 말은 지금도 우리들이 곱씹어 볼 귀한 내용인것 같기도 하다..
조선의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 능인 "건릉(健陵)" 의 숨어있는 아름다운 내용들을 보고나서 다시 입구로 나오는 길에도 푸르런 신록이 아름다운 오솔길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사도세자" 의 아들인 "정조 임금" 은 생전에 그의 아버지를 임금으로 추존하려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노론"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고종" 임금이 즉위하여 비로소 "사도세자" 를 왕으로 추존하고 묘호를 "장조(莊祖)" 로 격상하고 "융릉(隆陵)" 으로 되었다고 하니 사후에도 "정조임금" 의 효심이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번 연휴 기간에 들려본 경기도 화성의 "융릉(隆陵) 과 건릉(健陵) 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뒤주속에 가두어 무참히 죽게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본 아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스려 있고 먼 훗날 임금이 되어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불러보는 "사부곡(思父曲)" 이 울러퍼지는 듯한 "융릉(隆陵)-(사도세자와 헌경왕후의 능), 과 건릉(健陵)-(조선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 능)" 의 지난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정말 의미있는 시간을 가진것 같다.